나누지 않고, 하나로 합쳤습니다.
최초 요청
창비시선 통권 500호 기념 팝업스토어. 시를 맡아보는 · 들어보는 · 써보는 세 가지 체험을 각각 구성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진단
목적은 시집 판매가 아니라 2030 세대에게 창비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체험을 세 곳에 나눠 두면 감각이 끊깁니다. 필요한 것은 체험의 개수가 아니라 한 번에 깊이 빠지는 경험이었습니다.
버린 선택지
요청받은 대로 세 체험을 각각 분리 배치하고, 관행대로 체험존을 매장 안쪽에 두는 구성
처방
듣기·맡기·보기를 하나의 감각 체험으로 통합하고, 그 체험을 입구 동선 맨 앞에 배치했습니다. 공간은 앞에 힘을 주고 중간에서 덜어낸 뒤 출구에서 한 번 더 — 강약으로 설계했습니다.
실행 범위
공간 기획 · 2D/3D 시뮬레이션 · 출입 동선 시공 · 디스플레이 연출 · 체험 콘텐츠 설계 · 굿즈 기획과 제작 · 인쇄물 · AI 동선 데이터 측정 · 현장 운영
결과
앞을 지나간 33,141명 중 9,154명이 3초 이상 응시, 1,741명이 체험을 완주했습니다. 체류는 일반 전시 3분 12초 대비 통합 감각 체험 5분 29초, 시 쓰기 6분 40초. 사전 신청은 2주간 850명이었습니다.
팝업스토어를 만들다 보면 이런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체험 세 개만 넣어 주세요." 저희도 예전엔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요청받은 개수를 채우는 게 안전하니까요.
그런데 현장에 나가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첫 번째 체험만 하고 나가 버립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체험은 세 개인데 경험은 하나도 남지 않는 거죠.
창비가 요청한 것
창비시선 통권 500호. 기념할 만한 숫자였고, 그래서 팝업이라는 형식이 선택됐습니다. 창비 쪽에서 정리해 온 체험은 세 가지였습니다. 시를 맡아보는 경험, 들어보는 경험, 써보는 경험.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다만 저희가 먼저 확인한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팝업의 목적이 무엇인가. 시집을 파는 자리인지, 아니면 시집을 사본 적 없는 세대에게 창비라는 이름을 남기는 자리인지.
답은 후자였습니다. 20대와 30대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것. 목적이 그렇다면 성공의 기준도 달라집니다. 몇 명이 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가 됩니다.
그래서 합쳤습니다
예전에 한 음악 레이블 팝업에서 미발매곡을 들려주는 코너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는데, 뒤에 줄이 한 시간씩 늘어섰습니다. 듣는 사람은 뒤통수가 따가워서 오래 못 있고, 기다리는 사람은 지쳐서 돌아갔습니다. 좋은 콘텐츠가 나쁜 동선을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그 경험 때문에 이번엔 반대로 갔습니다. 나누는 대신 겹쳤습니다. 시를 듣고, 맡고, 보는 것을 한자리에서 동시에 하도록 묶었습니다. 향을 맡으면서 시가 흐르고, 그 시가 눈앞에 놓여 있는 상태. 감각이 끊기지 않으니 한 번 들어온 사람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체험을 하나로 묶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걸 어디에 둘 것인가.
가장 좋은 걸 가장 앞에
보통은 체험존을 안쪽에 둡니다. 사람을 깊숙이 끌어들이려는 계산이죠. 저희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번엔 입구 맨 앞에 뒀습니다. 체류 시간이 긴 콘텐츠를 앞에 두면 그 앞에 사람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가게는 지나가던 사람을 멈춰 세웁니다. 오히려 안쪽에 숨겨 두면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간 전체는 강약으로 짰습니다. 앞은 밀도 높게, 중간은 힘을 빼고, 나가는 지점에서 한 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하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체험을 세 개로 나눴다면, 세 번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숫자로 확인한 것
이번 팝업에는 AI 동선 측정을 붙였습니다. 몇 명이 지나갔고, 몇 명이 멈춰 섰고, 어느 구역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가 데이터로 남습니다. 감이 아니라 기록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간 동안 앞을 지나간 사람은 33,141명. 그중 9,154명이 3초 이상 매장을 쳐다봤고, 1,741명이 안으로 들어와 체험을 끝까지 마쳤습니다.
흥미로운 건 구역별 체류 시간이었습니다. 일반 전시 구간이 3분 12초, 통합한 감각 체험이 5분 29초, 시를 직접 써보는 구간이 6분 40초. 체험을 모두 거친 방문자는 10분 넘게 머물렀습니다.
특히 "시를 써보는" 체험은 저희도 반신반의했던 코너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손으로 뭘 쓸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오래 머문 구간이 여기였습니다. 쓴 종이를 벽에 붙이게 했더니, 팝업 후반부에는 그 벽 자체가 하나의 전시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팝업의 성패는 무엇을 넣느냐보다 무엇을 겹치느냐에서 갈립니다. 체험의 개수는 기획서를 채우지만, 경험의 깊이는 사람을 붙잡습니다.
저희가 창비에 드린 제안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던 세 개를 하나로 합치자는 것, 그리고 그걸 가장 앞에 두자는 것. 덜어내는 쪽에 가까운 처방이었습니다.
그게 저희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만들기 전에 판단하고, 필요 없는 것은 팔지 않습니다.
팝업스토어를 만들다 보면 이런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체험 세 개만 넣어 주세요." 저희도 예전엔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요청받은 개수를 채우는 게 안전하니까요.
그런데 현장에 나가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첫 번째 체험만 하고 나가 버립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체험은 세 개인데 경험은 하나도 남지 않는 거죠.
창비가 요청한 것
창비시선 통권 500호. 기념할 만한 숫자였고, 그래서 팝업이라는 형식이 선택됐습니다. 창비 쪽에서 정리해 온 체험은 세 가지였습니다. 시를 맡아보는 경험, 들어보는 경험, 써보는 경험.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다만 저희가 먼저 확인한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팝업의 목적이 무엇인가. 시집을 파는 자리인지, 아니면 시집을 사본 적 없는 세대에게 창비라는 이름을 남기는 자리인지.
답은 후자였습니다. 20대와 30대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것. 목적이 그렇다면 성공의 기준도 달라집니다. 몇 명이 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가 됩니다.
그래서 합쳤습니다
예전에 한 음악 레이블 팝업에서 미발매곡을 들려주는 코너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는데, 뒤에 줄이 한 시간씩 늘어섰습니다. 듣는 사람은 뒤통수가 따가워서 오래 못 있고, 기다리는 사람은 지쳐서 돌아갔습니다. 좋은 콘텐츠가 나쁜 동선을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그 경험 때문에 이번엔 반대로 갔습니다. 나누는 대신 겹쳤습니다. 시를 듣고, 맡고, 보는 것을 한자리에서 동시에 하도록 묶었습니다. 향을 맡으면서 시가 흐르고, 그 시가 눈앞에 놓여 있는 상태. 감각이 끊기지 않으니 한 번 들어온 사람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체험을 하나로 묶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걸 어디에 둘 것인가.
가장 좋은 걸 가장 앞에
보통은 체험존을 안쪽에 둡니다. 사람을 깊숙이 끌어들이려는 계산이죠. 저희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번엔 입구 맨 앞에 뒀습니다. 체류 시간이 긴 콘텐츠를 앞에 두면 그 앞에 사람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가게는 지나가던 사람을 멈춰 세웁니다. 오히려 안쪽에 숨겨 두면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간 전체는 강약으로 짰습니다. 앞은 밀도 높게, 중간은 힘을 빼고, 나가는 지점에서 한 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하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숫자로 확인한 것
이번 팝업에는 AI 동선 측정을 붙였습니다. 몇 명이 지나갔고, 몇 명이 멈춰 섰고, 어느 구역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가 데이터로 남습니다. 감이 아니라 기록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간 동안 앞을 지나간 사람은 33,141명. 그중 9,154명이 3초 이상 매장을 쳐다봤고, 1,741명이 안으로 들어와 체험을 끝까지 마쳤습니다.
흥미로운 건 구역별 체류 시간이었습니다. 일반 전시 구간이 3분 12초, 통합한 감각 체험이 5분 29초, 시를 직접 써보는 구간이 6분 40초. 체험을 모두 거친 방문자는 10분 넘게 머물렀습니다.
특히 "시를 써보는" 체험은 저희도 반신반의했던 코너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손으로 뭘 쓸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오래 머문 구간이 여기였습니다. 쓴 종이를 벽에 붙이게 했더니, 팝업 후반부에는 그 벽 자체가 하나의 전시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팝업의 성패는 무엇을 넣느냐보다 무엇을 겹치느냐에서 갈립니다. 체험의 개수는 기획서를 채우지만, 경험의 깊이는 사람을 붙잡습니다.
저희가 창비에 드린 제안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던 세 개를 하나로 합치자는 것, 그리고 그걸 가장 앞에 두자는 것. 덜어내는 쪽에 가까운 처방이었습니다.
그게 저희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만들기 전에 판단하고, 필요 없는 것은 팔지 않습니다.